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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2-13 14:33
최초의 지휘를 해보았다.
 글쓴이 : 하모니코치
조회 : 1,239  

책갈피에서 구겨진 사진이 나왔다.

2003년 재수를 한 큰 아들의 수능 결과가 안 좋아서 가족 모두가 우울했었다.

좌절하는 아들을 어찌 위로해야 할지 몰랐고 아무도 만나기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당 반장님께서 연말 성탄 기념 합창 발표회가 있는데 우리 구역 지휘를 부탁하셔서 몹시 당황했다.

성당 반모임도 잘 나가지 않고 교우들도 모르고 태어나서 지휘라는 걸 해본 적도 없었다.

더구나 사람들 앞에 나설 상황이 아님을 말씀드리고 정중히 거절하고 잊고 있었다.

며칠 후 반장님이 또 급히 오셨다. “지휘자가 집에 일이 생겨서 갑자기 못 오신다는데 오늘만 요안나 씨가 도와주셔요.”라고 했다.

나는 상황 설명을 하고 난색을 표하자 “요안나 씨 상황은 알지만 지금 우리 집 거실에 20명이 모여 있는데 한번 모이는 것도 어려운 일

이고 해서 오늘만 부탁해요.” 연세가 지긋하신 반장님께서 애타게 말씀하셨다.

난감한 상황 자체! 반장님 댁에 가서 교우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하루만 봉사하기로 했다.

그때 교우님들이 정했던 자유곡이 설운도씨의 ‘누이’라는 노래에 깜짝 놀랐고 가사 중에 ‘누이’가 들어가는 부분을

 ‘주님’으로 바꿔서 부른다고 했다.

재미있는 발상이라고 생각했고 그 날은 전체 곡의 흐름 파악과 파트별 연습을 했고 내 역할을 끝냈다.

그런데 그 후로도 지휘하시는 분이 오실 수 없다면서 내 발목을 붙잡는 것이 아닌가?  티끌만큼도 내키지 않았다.

연로하신 반장님께서 며칠 연달아 요청하시는데 외면할 때마다 나쁜 교우가 된 것 같은 불편함이 나를 괴롭혔다.

빼도 박도 못한다는 상황이 바로 이런 것이다. 결국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휘라는 걸  했다.

어려웠던 점은 내가 살던 아파트 지역이 재건축으로 인해서 구역 분위기가 어수선했고 이사를 시작했기에 인원수도 작아서

노래 소리도 작았다. 모든 여건이 안 좋았다. 하지만 한 가지 의미를 부여하자면 나 역시 ‘10년 동안 살던 정든 동네를 떠나면서

 잊을 수 없는 추억 한 가지를 남기는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무거운 마음을 잠시 잊고 연습할 때만은 우울함을 잊을 수 있었다.

적은 인원이었지만 이 부족한 아마추어 지휘자를 응시하며 연습해 주셨던 교우님들께 감사했다.

화려한 넥타이를 맨 연세 지긋하신 남자 교우님들, 나도 빨간 블라우스를 입고 미소를 띠우고 난생 처음 지휘를 했으니

어찌 기억에 안 남을까?

내가 지휘하는 모습이 너무 신이 나 보였던지 신부님이 “저 빨간 블라우스 입은 지휘자 정말 신나게 지휘하네.”라고 하셨다고 한다.

내 상황을 알고 모두들 고마워하셨다.

힘들었던 상황도 옛날 얘기가 되었고 맘 고생했던 만큼 성실한 모습으로 장성한 큰 아들이 고맙다.

‘누이’라는 노래는 또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다 지나가리라!”